마지막으로 샀던 시집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지독하게 우울하고 침잠되어 있던 나는 기형도의 시들을 읽으며 더 깊은 우울함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헤아려보니 놀랍게도 시집을 산 것이 10년도 더 넘었다.
가뜩이나 독서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데, 내 생각에 장르 중에서도 특히 ‘시’는 더 읽히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쉽게 생각해보면 시는 아마도 특별히 더 난해하거나 재미가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시에 대한 관심이 생겨 요즘 독자들이 많이 읽는 시집이 뭔가 하고 찾아보던 중 표지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시집 한 권을 찾았다.


앞서서 이 글은 문학적인 지식의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에 대한 통찰이 있는 것도 아닌 시집에 대한 가벼운 소개글 정도이다. (사실 특별히 소개가 필요한 시집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제목과 같이 시집의 표지 디자인은 토마토의 색상과 닮아 있었다.
근 10년 만에 ‘요즘 시집’을 읽어보는 나는 사실 시에서 쓰인 단어와 형식에 적잖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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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
「진짜진짜 축하해」 중
흥청망청
왜 이리 신이 나지?
공짜 비행기 티켓을 얻은 것처럼
노래방 애창곡 다 같이 불러주는 것처럼
손흥민이 골 넣었을 때처럼
「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 중
문학이 으레 그렇지만 단어와 언어에 가장 민감한, 그 중에서도 정제된 단어들의 극치라고 하는 ‘시’에서 이런 파격적인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흔히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시도 그렇게 변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꼰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10년 만에 이 시집을 샀을까?
나는 남을 돕는 팔자라고 그랬다
그렇게 말한 사주쟁이가 한둘이 아니다
(... 중략...)
행운의 색깔은 하늘색
오늘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늘색은 하나도 없네
(... 중략...)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고 적었다
월급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때 가스가 끊겼을 때 이십육 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
(...중략...)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신년운세」 중
첫 번째 실린 시 「신년운세」에서 남을 돕는 팔자를 가졌다는 시인은 정작 본인은 돕지 못하는 팔자였다고 생각한 듯 앞쪽에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고 적었다. 행운의 색인 하늘색 물건도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
특별히 믿지는 않는,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는 오늘의 운세를 보고 나서 창문을 열고 방 청소를 하던 시인은 책상 서랍 속에서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고 적힌 찢어진 노트 한 장을 발견하고 ‘가지고 있는 하늘색 물건은 없지만 창문 밖의 온 하늘이 이미 하늘색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늘만큼의 행운을 가진, 남을 돕는 팔자를 타고난 시인이 이름 세 자 적어서 낸 이 부적 같은 시를 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집의 시들을 읽을 때는 시인이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시인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인은 「맨발은 춥고 근데 좀 귀여워」에서
가슴에 면접 수험표나
마음에도 없는 명찰 붙어 있다고
기죽지 말고
같은 귀여운 위로를 전하기도 하고
「검은 고양이와 자객」에서는
나, 태어난 지 서른 해가 되어 가는데
여전히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
며 누구라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집안에 혼자 있다가 외친 외마디 욕설(씨발)과 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내가 숨지 않아도 세상은 나를 숨겨준다’며 세상이 자신을 자객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의 고독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죽어버려」에서는 ‘세상이 멸망해야 한다’는 친구에게
나라면 멸망에게 말하겠어
죽어 버려 강도 같은 너에게 내어 줄 건 아무것도 없어
라고 적으며
모든 페이지에 같은 이야기만 적혀 있다고 해도
모든 의미를 사랑해로 바꿔 읽는다면, 이를테면
죽어 버려
끝, 같은 건 상상 속에만 있고 우리의 상상 때문에
우주가 우리를 떠나지 못했으면 좋겠어
라며 사소하고도 소중한 일상이 지속되는 것의 고마움을 전한다.

낡고 이상한 세계에서
더 낡고 이상한 세계로
옮겨 가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무연히 지켜봤다
영원히 찾아 헤매겠다 생각했던 것들
무수한 별, 아름다움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 중
시인이 잃어버린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무엇일까?
일차원적으로 신체의 기관인 심장 대신 들어가 있는 토마토를 생각해 봤다. 심장보다야 튼튼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토마토는 단단한가?
놀이터의 모래 위에 그려진 하트모양처럼 우리 마음은 언제 흩어질지 모를 만큼 연약하고, 그래서 아마도 시인은 우레탄 심장(「한양아파트」 중)을 갖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시지만 시는 다른 책보다도 짧고, 조금씩 천천히 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봄에는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가진 고선경 시인이 전하는 귀엽고, 내밀하고, 봄날의 다정한 위로 같은 시들을 읽으며 행운의 시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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